벽진 이씨 목차 연원 인물 집성촌 조선왕실과의 인척 관계 항렬표 각주 외부 링크 둘러보기 메뉴벽진이씨 대종회벽진 이씨 - 네이버 지식백과과거 내용 찾기『고려사』 권92, 열전5벽진이씨 대종회
이씨경상북도 소재 성씨벽진 이씨성주군
경상북도성주군벽진면한국의 성씨
벽진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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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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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이총언 (李憎言) |
주요 인물 | 이맹전, 이장곤, 이상길, 이세진, 이항로, 이우익, 이민수, 이석채, 이석영, 이수원, 이헌승, 이광기, 이언주 |
인구(2015년) | 109,267명 |
벽진이씨 대종회 |
벽진 이씨(碧珍 李氏)는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이총언(李悤言)이다.
목차
1 연원
1.1 고려사 기록
1.2 벽진이씨 대동보 발췌
1.3 벽진이씨본원 역문
1.4 벽진이씨와 성주, 경산, 청송, 성산 이씨와의 관계에 관하여
2 인물
3 집성촌
4 조선왕실과의 인척 관계
5 항렬표
6 각주
7 외부 링크
연원
벽진 이씨의 시조 이총언(李悤言)은 신라 말에 벽진태수(碧珍太守)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나이 61세에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창업에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 개국원훈(開國元勳) 벽진장군(碧珍將軍)에 올랐고, 벽진백(碧珍伯)에 봉해졌다.[1]
이총언의 아들 영(永)이 대제학과 지경산부사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방회(芳淮)는 추밀원사를 역임하여 가세를 일으켰다.
고려사 기록
이총언(李悤言)은 기록에 그 족보가 나와 있지 않다. 신라 말에 벽진군(碧珍郡)을 수비했는데, 당시 도적 떼가 창궐하였으나 이총언이 성을 단단히 수리하고 굳게 지켰으므로 백성들은 그 덕분에 편안할 수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서로 힘을 합하여 화란을 평정하자고 설득하자, 이총언은 글을 받고 매우 기뻐하며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따라 적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영이 당시 나이가 열여덟이므로, 태조가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그의 처로 삼아주었다. 또 이총언을 자기 고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이웃 고을의 정호(丁戶)2) 229호를 더 내려주었으며, 충주(忠州)·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의 창고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또한 친필 서한을 보내어 변함없는 굳은 신의를 표시하며,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변치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이총언은 이에 감격하여 군정(軍丁)을 단결시키고 재물과 군량을 비축하여, 신라와 후백제가 필사적으로 다투는 틈바구니의 외로운 성으로 당당히 동남쪽에서 태조를 성원하였다. 태조 21년(938)에 죽으니 나이가 여든하나였다. 아들은 이달행(李達行)과 이영이다.[2]
벽진이씨 대동보 발췌
고려 삼중대광 개국원훈 벽진장군 이공의 휘는 총언이니 곧 벽진 이씨의 시조이다.
삼가 고려사를 살펴보근데 왕순식부전에 이르기를 《벽진장군 이총언이 신라말에 벽진고을을 보전하는데. 이 때 도둑의 무리들이 날뛰었으나 총언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을 입어 평안하였다. 이에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동심협력하여 화난을 평정하자고 효유하니 총언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케 하였다. 영의 그때 나이 십팔세였는데 대광으로 삼아 사도란 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총언을 벽진장군으로 임명하여 이웃 고을의 정호 이백이십구호를 더 주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이천이백석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 자손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고 하니 총언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시키고 군양을 저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 있으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되었다. 태조이십이년무술(938)칠월임자일에 졸하니 향년이 팔십일세였다》고 하였다.
그 밖에 가승과 여지승람에 뒤섞여 나온 것이 대의는 이미 같으나 또한 번갈아 나타난 것도 있으니 이에 이러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함에 이총언에게 명하여 벽진 옛 터를 진호케 하고 이웃고을 민세로서 식록케 하여 백자천손까지 종시일절의 맹서를 맺어 신하의 예로서 대우하지 아니하였다,』 고 하였다. 또한 이르기를 『고려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이총언이 벽진태수로서 오직 의연히 항복하지 아니하고 동남의 명성과 위세로 서로 의지하여 안연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자 하였으나 총언과는 옛부터 친한사이이므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도 또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 돌아감을 알고 그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케 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해서 벽진장군으로 삼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었다』고도 하였다.
벽진이씨본원 역문
이총언이 공훈으로서 벽진에 봉해졌음으로 인하여 본관으로 삼았다.
- 성주에 이씨가 셋 있으나 벽진장군에서 나온 이씨가 가장 오래이다.
- 벽진장군 이총언(신라 헌안왕 이년 무인생 ; 858)은 사기에 세계를 유실하였으나 신라말에 벽진군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당시 도적의 무리가 충만하였으나 공이 성을 튼튼히 하여 굳게 지키니 백성들이 그 덕화에 힘입어 평안하였다. 고려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함께 협력하여 화난을 평정할 것을 효유하니 공이 글을 받들고 매우 기뻐하여 아들 永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태조를 쫓아 정토케 하니 영의 그때 나이 십팔세 였는데 대광으로 삼아 사도란 귀녀를 처로 삼게하고 공을 본읍장군으로 배수하여 이웃고을의 이백이십구정호를 더 주고 또 충주 원주 광주 죽주 제주의 창곡 이천이백석과 소금 일천칠백팔십오석을 주었으며 다시 친서를 보내어 금석같은 신표를 보이면서 이르되 “자손에 이르도록 이 마음 변치 않으리라”하니 공이 이에 감격하여 군정을 단결하고 군량을 비축하여 고성으로써 신라와 후백제가 반드시 쟁취하려는 지역에 끼어있어면서도 흘연히 동남의 성원이 있었다. 태조이십일년 무술(938) 칠월 임자일에 졸하시니 향년이 팔십일세였다.(출전은 고려사 왕순식 부전).
- 이총언은 태조초에 벽진장군이 되어 본성을 지켰는데 임금이 손수 쓴 조서로서 금석같은 교분을 약속하여 이르기를 “백자천손에 이르도록 이 마음 변치 아니 하리라” 하니 총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절의를 지켰다. 이에 임금이 명하여 방읍의 민호를 주어서 정호를 보태고 또 염곡 사천여곡을 상 주었다.(출전은 여지승람 벽진명환).
- 왕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 이총언이 벽진군 태수가 되어 오직 의연하게 항복하지 아니하니 동남쪽의 성세가 서로 의뢰하여 평안하였다. 태조가 도멸코저 하였으나 총언과는 구지가 있음오로 차마 치지 아니하니 총언 역시 천명과 인심이 이미 왕씨에게로 돌아 갔음을 알고 그 아들 영으로 하여금 태조에게 귀의케 하니 태조가 기뻐하여 총언을 봉하여 벽진장군으로 삼아 소금 이천석을 하사하고 혼인을 맺어 대려의 맹서를 이루어서 백자천손까지 이 마음 변치 말자는 맹서가 있었다.(후손 흘가기)
- 이총언이 벽진장군 삼중대광 개국원훈이 되었는데 왕태조가 삼한을 통일할 때 벽진고허를 진수케하여 방읍의 민세를 식록케 명하고 백자천손까지 종시 한결같이 절의를 지킨다는 맹약이 있어 신예로서 대우하지 아니 하였으니 의임의 후중함과 진남의 공업이 지대하다 할것이다.(이참봉 보첩).
- 구보에 벽진장군의 묘는 성주수촌 고허에 있다고 하나 병난에 실전하였으며 경종삼년계묘(1723)에 후손 봉조하 세근이 영백이 되었을 때 그 족제 세필과 같이 의논하여 설단망제하려 했으나 성취하지 못했다가 그 후 영조사십육년경인(1770)에 세필의 아들 정태가 유지에 따라 종의를 창도하여 이해 십월보름날에 수촌서록에 설단하여 년 일회 제향키로 하였다.
벽진이씨와 성주, 경산, 청송, 성산 이씨와의 관계에 관하여
벽진의 유래는 옛 성산가야국 에서 부터 본피현, 신안현, 벽진군, 경산부, 광평군, 경산부, 성주목, 경산부, 성주목, 성산현, 성주군으로 승격 또는 강등, 개칭되어 왔다고 문헌에 나온다. 벽진이씨도 지명의 변화에 따라 잠시 성주이씨나 성산이씨로 불렀을 때가 있었다. (1월 9일자 이수호씨가 올린글에 대동보 272 페이지에 정헌선생 비문에 '성주이공 세근지묘'라 표시된 것은 성주이씨로 불릴 당시에 세운 비문이라고 이해시면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파에 따라서 혹은 사는 집성촌에 따라서 명곡이씨(중국 천자가 산화선생이 계신 곳을 명곡으로 명명하여 하사), 산화이씨, 금산이씨(평정공이 사신 곳. 금릉의 고호), 견동이씨(감사공이 사신곳), 래진이씨(승원 자손들 집성촌), 명경이씨(문정공이 명경 급제함), 금릉이씨(금릉공 자손의 집성촌), 여은이씨(집성촌) 등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조 정조 이후에는 벽진이씨로 정립하여 일관되게 불렀다. 경산이씨와 청송이씨가 벽진이씨의 후손이라 함에 대하여는, 쳥송이씨는 경산이씨의 후손이라 되어있다.
경산이씨의 시조인 이덕부는 벽진이씨 시조의 장자인 이달행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었다. 경산 이씨의 구족보에는 위와 같이 벽진 장군의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몇대손인지도 알 수 없고 다른 기록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도 없어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최근 경산이씨 족보에는 벽진장군의 후손이라는 말은 넣지않고 있다. 참고로 성주에는 이씨성을 가진 본이 6본이 있다. 벽진이씨, 성주이씨, 성산이씨, 광평이씨, 경산이씨, 가리이씨 의 6본인데 성주 6리(李)라 부른다. 그 중에서 벽진이씨의 유래가 가장 깊다.
인물
이영(李永): 이총언의 아들.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제학이 되었다.
이방회(李芳淮) : 추밀원사를 역임하였다.
이극송(李克松, 1202년 ~ 1274년) : 호(號)는 빙옥재(氷玉齋),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으로 상호군(上護軍) 보(寶)의 현손(玄孫), 백운(白雲) 이상국(李相國) 규보(奎報)의 문인(門人). 1236년(고종 23) 명경문과(明經文科)에 급제하여 판삼사동지경연(判三司同知經筵), 춘추관사도총관(春秋館事都摠官)을 역임하였다.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하였으므로 왕(王)은 그를 가리켜, 한옥(寒玉)같은 정자(貞資)와 추수(秋水)같은 정신(精神)을 지녔다고 격찬(激讚)하여 빙옥(氷玉)이란 호(號)를 내렸으며 73세에 돌아가셨다. 의성(義城)의 봉강사(鳳岡祠), 성주(星州)의 빙옥재(氷玉齋)에 제향(祭享).
이명겸(李鳴謙, ? ~ ?) : 조선의 문신, 호(號)는 지산재(地山齋).산수재(山水齋).이조판서(吏曹判書) 신지(愼之)의 아들로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박사(博士)를 지내고 호당(湖堂)에 뽑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1449년에 제주(濟州) 안무목사(按撫牧使)에 보임(輔任)되었다.1451년에 제주(濟州) 방어대책긴요성(防禦對策緊要性)을 상소(上疏)하여 왕(王)의 재가(栽可)를 받고 전함(戰艦) 40소를 신조(新造)해서 제주(濟州)에 30소,대정현(大靜縣)에 10소를 요해지(要害地)에 포박(砲泊)시켜 침입한 왜적(倭敵)을 격퇴, 많은 공을 세워 첨지중추(僉知中樞)를 거쳐 강원. 전라. 충청. 평안. 경기 5도 감사, 한성부윤(漢城府尹),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1453년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가 살해되어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인 매서 이징옥(李澄玉)이 파면되고 거의순국(擧義殉國)함을 보고 관직에서 물러나 초계(草溪)에서 만년을 보냈다.
이철균(李鐵均, 1450년 ~ ?) : 자(字)는 사형(士衡), 호(號)는 월오(月塢), 판서(判書) 건지(建之)의 증손(曾孫). 김굉필(金宏弼).김종직(金宗直)의 문에 동유수학(同遊修學)하여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을 받았고, 1465년(세조 10) 진사시(進士試)에 장원, 1496년(연산군 2),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였다.연산군때 무오사화(戊午士禍)를 피하여 성산(星山)에 은거하다가 중종조(中宗朝)에 관곽(棺槨)을 특사(特賜)받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이견간(李堅幹, ? ~ ?) :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 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제, 주 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조에 벼슬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椧)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椧谷)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 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儒學者)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제주 우탁(祭酒 禹倬), 문안 이견간(文安 李堅幹), 문충 이제현(文忠 李齊賢) 등 몇 사람 뿐이다. 우 탁의 주역(周易)과 이견간의 춘추(春秋)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陸宣公 : 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 지(陸贄)와 짝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靑溪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失傳)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壇)을 모으고 문곡서당(汶谷書堂)을 세워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세워졌다.
이경(李坰, 1580년 ~ 1670년)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동야(東野), 호는 오수. 공조판서 상길(尙吉)의 아들이다. 1621년(광해군 13) 유학으로 있을 때 이이첨(李爾瞻)이 구경록(仇景祿)의 옥사에 자기 아들이 관련되어 역옥을 늦추자 이를 논박하는 소를 올렸다. 1623년(인조 1) 진사로서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1624년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그해 8월 장령으로 있으면서 집의 김세렴(金世濂), 장령 박안제(朴安悌) 등과 함께 이조판서 이귀(李貴)가 추숭(追崇)을 주장하고 자천한 것을 논박하다가 중신을 모함하였다는 죄목으로 당진현감에 좌천되었다. 그 뒤 1626년에 정언· 지평을 거쳤다. 1628년 3월 사서로 있으면서 국역(鞫逆)의 날에 병을 칭탁하여 불사(不仕)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같은해 6월에 정언에 임명된 뒤 강진현감·장령 등을 두루 거쳤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강화천도가 이루어질 때 아버지 상길이 적군이 상륙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불러 소모사(召募使)가 되어 직분을 다할 것을 부탁하고 강도(江都)에 입성하여 자결하였는데 그는 포구를 지키던 그의 임무를 저버리고 아버지의 시신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로 인해 그가 비록 의병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자처(自處)의 도가 어긋났다고 하여 파직당하였다.
이사지(李思之, ? ~ ?) : 호(號)는 여은정(麗隱亭), 견간(堅幹)의 현손(玄孫). 공양왕 때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왜구의 침입을 소탕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니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72현(賢)과 함께 송도(松都) 동남현(東南峴)에 올라가서 조천관(朝天冠)을 걸고 폐양립(蔽陽笠)을 쓰고 모두가 절의를 지키며 수차에 걸친 조선조(朝鮮朝)의 벼슬을 거절하였다. 말년을 관악산중(冠岳山中)에서 포영자적(哺영自適)하면서 보냈으며, 밀양(密陽)의 용안서원(龍?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계전(李季專, 1404년 ~ 1459년) :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의 네째 동생으로 타고난 성품이 영민(英敏)하고 문장(文章)이 영발(英發)하여 1447년 문과(文科)에 급제, 성종조(成宗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겸 경기관찰사(京畿觀擦使).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중서(中書)에 일입(一入)하여 대강(臺綱)을 재진(再振)하여 후설은대(喉舌銀臺)에 이르며 권형전부(權衡銓部)하고 화요약력(華要略歷)하여 휴유영망(休有令望)이라 졸후부문(卒後訃聞)에 철조하였으며 증부(贈賻)하고 공희(恭僖)란 시호를 내렸다.
이충민(李忠民, 1588년 ~ 1673년) : 자(字)는 여직(汝直), 호(號)는 모암(慕巖), 참의(參議) 탁미의 아들, 정한강(鄭寒岡).장여헌(張旅軒)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여 문장덕행(文章德行)이 제현(諸賢)의 귀감이 되었기에 하담(荷潭) 김시양공(金時讓公)이 영남(嶺南)을 안찰(按察)할때 현량 천거(賢良薦擧)에 수위(首位)로 올랐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
이상급(李尙伋, 1572년 ~ 1637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사언(思彦), 호(號)는 졸부(拙夫). 습재(習齋), 시호(諡號)는 충강(忠剛). 희선(喜善)의 아들로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門人)이며 1603년(선조 36)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자(正字). 저작박사(著作博士) 등을 지내고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연경(燕京)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던 중에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었다.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을 때 정조(鄭造)가 안찰사(按察使)로 부임하자, 그 속관(屬官)이 되기 싫어 사임하고 충주(忠州)에 들어가 경조(耕釣)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으며,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장령(掌令).집의(執義).단천(端川)과 연안군수(延安郡守)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때 남한산성으로 인조(仁祖)를 호종(扈從)했다가 중씨(仲氏) 상길(尙吉)이 순절했다는 비보를 듣고 통곡하며 강화(江華)로 가던 도중에 적병(敵兵)에게 살해되었다. 1777년 병자제사(丙子諸史) 존주록(尊周錄)에 명재(命載)되었고, 유소(儒疏)로 인하여 대신헌의(大臣?議)에서 일문쌍절(一門雙節)이라고 하였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이상길(李尙吉, 1556년 ~ 1637년)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사우(士祐), 호는 동천(東川). 1585년(선조 18)진사로 식년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99년 광주목사로서의 선정을 베풀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602년 정언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을 정여립(鄭汝立) 일당으로 몰아 탄핵한 죄로 풍천(豊川)에 유배되었다가 1608년 풀려났다. 그뒤 회양부사,안주목사,호조참의 등을 지냈으나 정인홍 등이 정권을 잡자 사직하고 이항복(李恒福)과 교우하였다. 17년(광해군 9) 동지사(冬至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폐모론이 일어나자 남원(南原)에 돌아가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뒤 승지, 병조참의 공조판서를 지낸 다음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묘사(廟社)를 따라 강화(江華)에 들어갔다가 청군(淸軍)이 육박해 오자 자결하였다. 좌의정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동천집]이 있다. 시호는 충숙(忠肅)
이인(李寅, 1608년 ~ ?)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야수(野搜), 호(號)는 소옹(素翁),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의 아들. 계곡(溪谷) 장문충공(張文忠公) 유(維)의 문인. 1635년(인조 13)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642년(인조 20)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을 거쳐 제주목사. 우부승지(右副承旨).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이건지(李建之, 1357년 ~ ?) : 자(字)는 천달(天達), 시호(諡號)는 정헌(正獻)으로 견간(堅幹)의 현손(玄孫). 13세에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1395년(태조4)에 중국에 유학(遊學)하고, 1406년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장 보(張輔)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남(?南)을 정토(征討)하는데 종군하여 큰 공(功)을 세워 남경별기영도위(南京別騎營都慰)에 배명(拜命)되었다. 1409년(태종 9)에 환국(還國)하여 병조(兵燥)에 재전(再典)되고 서북이도(西北二道) 경략사(經略使)로서 맡은 임무(任務)를 잘 수행하여 5개월만에 평안을 이루어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이상일(李尙逸, 1600년 ~ 1674년)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여림(汝林), 호는 용암(龍巖).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1630년(인조 8) 식년문과에 급제, 성균관박사·승정원주서가 되었다. 36년 병자호란 때 황해도도사로 산성을 지키고 주민을 보호하였다. 49년(효종 즉위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자점(金自點)을 논핵하였으며, 이듬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54년 폐서인(廢庶人)된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신원을 주장하다 사형된 김홍욱(金弘郁)의 옥사에 연루되어 면직되었으나 이듬해 안동부사로 복직되었다. 64년(현종 5)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66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이 지방의 민폐에 관한 옛 사실이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을 사직하고 충청도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삼인사적(三仁事蹟)》이 있다.
이기보(李基普, 1738년 ~ 1811년) : 조선의 학자. 자는 경수(景修). 호는 팔물재(八勿齋) 정철(鄭徹)의 아들. 송명흠의 문인이 되어 성리학을 배우고 뒤에 김원행에게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천염에 올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이장곤(李長坤, 1474년 ~ ?)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희강(希剛), 호는 금헌(琴軒)· 학고(鶴皐), 우만(寓灣). 참군(參軍)의 승언(承彦)의 아들. 김굉필의 문인. 1495년(연산군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02년(연산군 8) 알성문과에 급제한 뒤 교리로 있다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는데, 연산군이 그가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여 처형하려 하자 함흥(咸興)으로 도망하여 숨어 살았다. 1508년(중종 3)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홍문관 부교리,교리, 사헌부장령을 거쳐 동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인물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12년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이어서 평안도병마절도사,이조참판,예조참판 등을 거쳤다. 15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함경도관찰사로 교체되었다. 18년 이조판서가 되고 19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남곤,심정등이 주도한 기묘사화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등 사화에 연루된 사림들의 처형에는 반대하다가 심정(沈貞) 등의 미움을 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22년 복관되었으나, 여강.창녕등지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금헌집>> 있다. 시호는 정도(貞度).
이항로(李恒老, 1792년 ~ 1868년) :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초명은 광로(光老). 경기도 양평(楊平) 출생. 양근(楊根) 출생. 3세때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배웠다. 1808년(순조 8) 한성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 이를 단념하였다. 그후 학문과 후학양성에만 몰두하였다. 40년(헌종6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참봉(揮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62년(철종 13) 이하전(李夏銓)의 옥사(獄死) 때 무고로 투옥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나왔으며, 64년(고종 1) 조두순(趙斗淳)이 천거하여 장원서별제,전라도사,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절하였다. 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가 되어 주전론을 적극 주장하였고, 이어 공조참판에 올라 경연관으로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경복궁 중건 및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배척을 받았다. 그는 당대 이진상(李震相), 기정진(奇正鎭)과 함께 침체되어가는 주리철학(主理哲學)을 재건한 3대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그의 사상(思想)을 보면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철저하게 주리론(主理論)으로서 우주론(宇宙論)에 있어서는 이기합일설(理氣合一說)에 반대하고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 섰다. 즉 이와 기를 구별하고 차등적으로 인식하여 이가 주(主)가 되고 기가 역(役)이 되어야 편안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가장 저명한 성리학자요 한국 역사상 보기 드문 민족교육자 (民族敎育者)로서 평소 애군여부(愛君如父).우국여가(憂國如家)를 문도(門徒)들에게 역설, 춘추대의 (春秋大義)를 주장하고 척사위정(斥邪衛正)을 내세워 민족주체의식을 고취시켜 한말창의(韓末倡義) 호국운동(護國運動)의 주역들을 대거 배출시켰다. 최익현(崔?鉉). 김평묵(金平默). 양헌수(梁憲洙). 유중교(柳重敎). 박문일(朴文日). 유중악(柳重岳). 박문오(朴文五). 이근원(李根元). 유홍석(柳弘錫)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은 인물들로서 이 외에도 훌륭한 이들이 숱하다. 저서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60권, <<벽계아언(蘗溪雅言)>>12권 <<화서집>> 편저에 《화서선생아언》 《문인어록》8권 《주자대전차의집보(朱子大全箚疑輯補)》70권,<<주자집차(朱子輯箚)>> 20권, 화동역사합편강목(華東歷史合編綱目)》 등 270여권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
이성간(李成幹, ? ~ ?) :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옹(雍)의 아들로 어릴때부터 병법(兵琺)을 좋아하여 기사(騎射)에 뛰어났으며, 충선왕(忠宣王) 및 충숙왕(忠肅王) 때에 중문지후(中門祗侯),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는데 충성(忠誠)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백형(伯兄) 견간(堅幹)은 문장 학행(文章學行)으로, 성간(成幹)은 무예 병법(武藝兵法) 으로 전세(傳世)하니, 세상사람들이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집이라 불렀다. 금릉(金陵)의 대금산(大禁山) 모원당(慕遠堂)에 제향(祭享).
이장길(李長吉, ? ~ ?)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자하(子賀). 승언(承彦)의 아들이다. 창녕에 거주하며 아버지·형제들과 함께 김굉필(金宏弼)로부터 학문을 배워 독실한 행실로 이름이 높았다. 후에 스승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권신들을 추종하였다. 1504년(연산군 10)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세금을 과도하게 징수하는 등 악정이 심하여 신극성(愼克性)·남경(南憬)과 함께 삼맹호(三猛虎)로 불렸으며, 의성현민들은 그를 몹시 미워하여 시를 지어 조롱하였다. 1507년(중종 2) 박원종(朴元宗) 등 중종반정 공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무고로 인하여 평안북도 벽동군의 관노(官奴)가 되었다. 그뒤 심정(沈貞)의 심복이 되어 1521년에는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가 되었고, 1631년 심정의 몰락과 함께 몰려나 고향으로 쫓겨났다. 이황(李滉)은 이와 같이 전후가 서로 다르게 처신한 그를 스승인 정자(程子)를 배반한 형서(邢恕)에 비유하였다.
이세근(李世瑾, 1664년 ~ 1735년) : 자는 성진(聖珍)이고, 호는 정헌이다. 지걸(志傑)의 아들이고 윤증의 문인이다. 맹동면 쌍정리 배미 사람이다. 1699년(숙종23) 문과 갑과(甲科)로 급제 사헌부 지평(地平)이 되고, 1699년(숙종25)에 음성현감(陰性縣監)을 지내고, 1709년(숙종35) 병조정랑(兵曹正郞), 이듬해 수찬(修撰)이 되고, 숙종41년 동래부사(東來府使)를 지냈다. 1721년(경종1) 충청도·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725년(영조1) 남양부사 도승지에 오르고 영조5년에 대사헌을 지냈다. 1733년(영조9)에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나라에서는 봉조하(奉朝賀)의 예우(禮遇)를 내리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갱장록(羹墻錄)을 써서 진상했다. 묘는 경기도 양주에 있고, 저서로 정헌집(靜軒集)이 있다. 맹동면 쌍정리에 후손이 살고 있다.
이후경(1558년 ~ 1630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여무(汝懋), 호(號)는 외재(畏齋), 호조참판(戶曺參判) 엄(儼)의 아들.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영남에서 이름난 유학자라 추앙을 받았으며 1601년(선조 34) 학행(學行) 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623년(인조 1) 유일(遺逸)로서 찰방(察訪).내첨시직장(內瞻時直長)을 거쳐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강화로 왕을 호종하고 하록원종훈일등(賀綠原從勳一等)에 책록되고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냈다. 병조참의(兵曺參議)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영산(靈山)의 덕봉서원(德峰書院)에 제향.
이세진(李世璡, 1669년 ~ 1749년) :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명서(明瑞). 지걸(志傑)의 아들이다. 1725년(영조 1)군수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지평이 되어, 삼사의 원활한 운영과 붕당의 폐해를 논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석방되어 필선·장령·헌납·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1729년 산림출신으로 등용된 집의 박필주(朴弼周), 장령 양득중(梁得中)의 비례(非禮)를 논하다가 산림과 유자(儒者)를 경멸하였다 하여 파직, 성문 밖으로 쫓겨났다. 다시 사간을 거쳐 참의에 올랐으나 직사(職事)를 잘못 처리하여 파면되고, 1742년 다시 승지에 발탁되었다가 연로하다는 이유로 특별히 동지중추부사에 승진하였고, 형조참판·한성좌윤 등을 거쳐748년 지중추부사로 기사(耆社)에 들어갔다. 그뒤 동지의금부사·한성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이흘(李屹, 1557년 ~ 1627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산립(山立), 호(號)는 려파, 백부(伯父)인 진사(進士) 희생(喜生)의 문하에서 공부한 후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갔고 1588년(선조 2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경학(經學)과 도학(道學)이 뛰어나 영남학자(嶺南學者)는 모두 경복(敬服)하였다.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후진(後進)교양에만 힘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희정당(喜靜堂)에 채례(菜禮)하고 합천(陜川) 고암서원(古岩書院)에 제향(祭享)
이도일(李道一, 1566년 ~ 1667년) : 자(字)는 관지(貫之), 호(號)는 초우헌, 참판(參判) 엄(儼)의 손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 문장덕행(文章德行)이 뛰어나 제현(諸賢)으로부터 추앙을 받았으며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일필성문(日必省問)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유음(遺蔭)으로 부사과(副司果)에 천거(薦擧)되었으나 사양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청태종(淸太宗) 용골대(龍骨大)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창의(倡義)하여 그의 창고정곡(倉庫正穀) 400석(石)을 군량미 (軍糧米)로 수송(輸送)하여 보내고 의병(義兵)을 모아 싸움터로 보냈기에 조정(朝廷)에서 칠월현감(漆原縣監)을 제수했지만 역시 사양하였다.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주장이 맞섰으나, 결국 성문(城門)을 열고 항복한다는 비보(悲報)를 듣고 통곡하면서 북벌책(北伐策)을 상소하여 설욕하고자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어필(御筆)로 동지중추(同知中樞)를 특제(特除)하고 장수(長壽)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다. 만년에 임해진(臨海津) 강상(江上)에 축정(築亭)하여 초우라 편명(扁名)하고 용슬헌(容膝軒)이라고도 한다. 창녕(昌寧) 덕림서당(德林書堂)에 제향(祭享).
이식(李軾, ? ~ ?) : 조선의 무장.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는 동파(東坡), 성산군(星山君) 사지(思之)의 증손(曾孫), 천자(天資)가 청분(淸芬)하고 일찍이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훈련부장(訓鍊副正)에 이르고 1504년 (연산군 10) 갑자(甲子).을축(乙丑) 양연간에 연산군의 학정(虐政)이 극에 달함을 보고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뜻을 받들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대왕(中宗大王)을 세웠다. 신부인(愼夫人)을 왕비(王妃)로 책봉하고(중종 1) 9월 2일 정국훈(靖國勳) 107인중 자첨(子瞻)은 26차(次)로 성산군(星山君)에 훈봉(勳封)되었다. 1520년 신진사류(新進士類)가 남곤(南袞)등에 의해 화(禍)를 당하자 통정가선대부(通政嘉善大夫)의 품계를 내놓고 물러나 밀양(密陽)에서 우거하다가 낙동강변에 고강정(高江亭)을 세우고 편안함을 즐겼다. 밀양(密陽)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祭享).
이주세(李柱世, 1671년 ~ 1721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미안, 호는 오일헌(五一軒), 언영(彦英)의 손자. 1699년(숙종 25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승정원 주서로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경학(經學) 및 시전(詩傳)을 진강하였으며 진학사(眞學士) 지교(지교0의 포(褒)로 시전(詩傳) 1질급(帙及) 음중팔선도(飮中八仙圖)를 어사(御賜)받고 병조좌랑(兵曺佐郞)을 거쳐 1720년 상원군수(祥原郡守)를 지냈다.
이약동(李約東, 1416년 ~ 1493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춘보(春甫), 호(號)는 노촌(老村), 시호(諡號)는 평정(平靖)으로 현령(縣令) 덕손(德孫)의 아들. 1441년(세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사첨시직장(司瞻시直長)을 거쳐 1454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찰). 황간현감(黃磵縣監)을 지내고 1458년(세조 4) 지평(持平).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459년 청도군수(淸道郡守), 1462년 사직하였다가 1464년 선전관(宣傳官), 146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1466년 종부시정(宗簿시正).구성부사(龜城府使:평북 서부), 1468년에 병으로 사직(辭職)했다. 1470년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도임(到任)하여 관하이속(官下吏屬)들의 부정(不正)을 단속하고 민폐를 근절, 공물(공물)의 수량을 감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1477년 대사간(大司諫).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천추사(千秋使)로 4월에 명(明)나라에 갔다가 8월에 돌아왔으며, 1478년 경주부윤(慶州府尹), 1482년 호조참판(戶曹參判), 1487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1486년 전라도 관찰사, 1487년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이조참판(吏曹參判), 1489년 개성유수(開城留守), 1490년 특승자헌대부(特陞資憲大夫)가 되고 성종조(成宗朝)에 기로소에 들어갔다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1514년 청백리(淸白吏)에 선발되었다. 금산(金山)의 경염서원과 제주(濟州)의 영혜사(永惠祠)에 제향(祭享).
이맹전(李孟專, 1392년 ~ 1480년) : 조선 초기 문신,학자.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의 아들로1427년(세종9) 친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36년에는 정언(正言)이 되고, 그 뒤 외직을자처하여 소격서령,거창현감 등을 지냈다. 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癸酉靖難)을 이르켜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탈취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거짓으로 눈이 어둡고 귀가 멀었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갔다. 평생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김숙자(金淑滋)등과 학문을 교유하며 그 뒤 30여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781년(정조 5) 서명선(徐命善)의 건의에 의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선산의 월암서원에 김주(金澍),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제향되고 함안(咸安)의 서산서원에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생육신(生六臣)으로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
이언(李彦, ? ~ ?) : 호(號)는 소심헌(小心軒), 시호(諡號)는 충독(忠篤). 봉상대부(奉尙大夫).군기소윤(軍器少尹).검교내시부사(檢校內侍府事)를 역임하고, 이태조(李太祖)를 많은 공(功)을 세워 개국원록 원종공신(開國原錄 原從功臣)에 봉해졌으며 강원.전라감사(江原全羅監司)를 지냈다.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세환(李世煥, 1664년 ~ 1752년) : 조선의 학자. 자(字)는 계장(季章), 호는 과재(果齋).율헌(栗軒), 시호는 효헌(孝獻), 서윤(書尹) 지웅(志雄)의 아들.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의 문인으로 1721년(경종 1) 학행으로 천거받아 연잉군의 사부(師傅)가 되고, 영조(英祖)가 왕위에 오른 후 감반지구교(甘盤之舊交)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752년(영조 28)에 효헌(孝獻)으로 증시(贈諡)되었다.
이언영(李彦英, 1568년 ~ 1639년) :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으로 자(字)는 군현(君顯),호 (號)는 완석정(浣石亭)으로 의리가 아니면 한올의 털이라도 취하지 않았던 절의지사(節義志士)로서 1568년 2월 18일 축시(丑時)에 경북 칠곡군 왜관읍 석전동에서 태어났다. 공(公)은 벽진장군(碧珍將軍) 이총언의 21세손(世孫)으로 고조(高祖) 유강(惟 康: 通仕郞), 증조(曾祖) 인손(麟孫: 成均進士), 조부(祖父) 운(運: 顯陵參奉), 그리고 좌랑(佐郞) 등림 (鄧林)의 아들로 출생 하였다. 공(公)의 가계는 고려시대부터 중앙정계에 진출한 명문가이다. 공(公)의 10대조 산화(山花) 이견간(李堅幹)선생은 고려초의 충열 충선 충숙 3대를 거친 명신으로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시와 문장으로 원(元)의 황제를 감복시킨 기록등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또 공(公)의 아버지 공암(孔巖) 이등림(李鄧林)선생도 대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인동부사등을 역 임한 청백리로 이름이 높을 뿐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만인의 사표(師表)가 된 분이다. 청렴결백한 몸가짐으로 선정을 배푼 공암공(孔巖公)의 덕을 글로 새긴 괘혜암(掛鞋巖)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괘혜암은 지방문화제 제184호로 지정되어 1980년에 구미시 인의동 374-5 삼거리로 이전하여 현재 시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청백공무원의 표상이 되고 있다. 이언영(李彦英)公이 나이 20세가 되어 보다 참된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을 찾아 갔는데 한강(寒岡)은「요사이 젊은 사람중에서 마음갖임이 확연하고 자질이 굳건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이제 그대를 보니 이와 같으니 후일 크게 성공 하리라」했다. 한편 이언영(李彦英)公을 맞이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선생은「이 사람은 가정교육을 참으로 잘 받았기 때문에 뒷날 집안을 빛낼 재목이다」라고 평했다. 이러한 예들은 공(公)의 가통(家統)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대에 걸쳐 학문을 숭상하고 사대부가 제일중요시 여기는 충효(忠孝)와 청렴(淸廉) 결백(潔白)의 사상을 강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좋은 토양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공(公)은 당대의 으뜸가는 석학(碩學)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 양(兩)선생을 동시에 사사했고 여기에 공(公)의 총명마져 가미되어 그 역시 훌륭한 학자가 되어 후진의 사표가 되었다. 1575년(선조 8년) 공(公)의 나이 8살 때 교수(敎授)직으로 있는 아버지 공암공(孔巖公)를 따라 전라도 남원(南原)향교를 방문한즉이 있었다. 이때 공암공이 석전제를 드리기 위하여 여러 헌관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선비들에게 인사를시키려고 공(公)을 명륜당으로 불렀다. 그 때 한 헌관이 공(公)에게 장난삼아 골려줄 생각에서 모(母) 자(字)운을 붙여 글을 지어 보라고 했는데 그는 서슴치 않고 붓을 들어「望母我身 我望母:어머니가 고향에서 나를 애타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 또한 어머니를 간절히 생각한다」라는 글을지으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놀랐다. 유년기에 집자성구(集字成句)가 가능했던 공(公)은 소년시절에는 서사원(徐思遠)의 훈도를 받았고 20세가 갓넘자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 정식 입문했다. 그는 정구(鄭逑)로부터 심성론과 절의학을, 장현광(張顯光)으로부터 심오한 우주철학을 배웠다. 1591년(선조24년) 23세때 생원(生員)이 되어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던 공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바로 귀향해서 와병중인 모부인(성씨)를 지성으로 시병간호하다가 1593년 봄에 농토를 팔아 전마(戰馬)40필(匹)을 마련하여 처 6촌이기도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공이 의령에서 창의(倡儀)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가서 의병활동을 활달하게 전개 하였다. 그곳에서 공은 영남우도에서 맹열한 의병활동을 전개한 오운(吳雲), 조종도(趙宗道), 박성(朴惺), 성안의(成安義)등 제공과 함께 토적(討賊)을 의논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1년(선조34)에 효렴(孝廉)의 천(薦)으로 순능참봉(順陵參奉)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아니하고 1603년(선조36) 10월 1일 36세의 나이로 임란(壬亂) 때문에 10년만에 처음 실시되는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가문과 고장을 크게 빛나게 하였다. 이때 판서직의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이「자네 급제가 왜 이렇게 늦었느냐」고 하자 그는「장원하느라 늦었습니다」로 응수하여 좌중을 한바탕 웃겼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승언(李承彦, ? ~ ?) : 자(字)는 사아(士雅), 호는 동원(東園), 참판(參判) 신지(愼之)의 손(孫). 김굉필, 김종직의 문(門)에 수학하여, 1472년(성종 3)에 생원시에 장원하고 유일로서 헌릉참봉.한성참군등을 역임한 후 창산(昌山)에 퇴귀(退歸)하여 낙동강사에서 시주(詩酒)와 금기로써 자오(自娛)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관의금부사에 추증, 창녕의 연암서원에 제향(祭享)
이여익(李汝翊, 1591년 ~ 1650년) : 자(字)는 비경(斐卿), 호(號)는 수봉(秀奉), 참봉(參奉) 응원(應元)의 아들로 성부용당(成芙蓉堂).장여헌(張旅軒)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여 1626년(인조 4) 생원.진사(生員進士) 양시(兩試)에 뽑히고, 유릉참봉(裕陵參奉)을 거쳐 1631년(인조 9)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 양산군수. 나주목사. 정언(正言). 장령(掌令). 보덕(輔德)을 역임하고 출전오읍(出典五邑)하여 청백(淸白)으로 이름이 났다. 양산(梁山)에는 청덕애민비(淸德愛民碑).나주읍(羅州邑)에는 동비(銅碑)를 건립하고 생사당(生祠堂)에 향사(享祀)한다.
이지웅(李志雄, 1628년 ~ 1701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만부(萬夫), 충강공(忠剛公) 상급(尙伋)의 손자, 연의 아들 1654년(효종 5)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여 1658년(효종 9) 관천 서사(筮仕)로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8군읍의 수령을 지내고,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에 이르러 사직, 학문으로 만년을 보냈다. 아들 효헌공(孝?公) 세환의 귀(貴)로써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
이지걸(李志傑, 1632년 ~ 1702년) : 조선의 문시, 자(字)는 수부(秀夫), 호는 금호(琴湖), 충강공 상급(尙伋)의 손자, 연의 아들. 1654년(효종 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輔)로 1684년(숙종 14)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천수되었으며, 후에 영덕현감(盈德縣監)으로 나갔다가 남형(濫刑)의 죄로 곤양(昆陽)에 유배, 1689년 풀려나와 1701년 아들 세근(世瑾)의 공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또 아들 세근의 분무원종공(奮武原從功)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고, 한시(漢詩)에 능해서 1,500여수를 남겼다.
이시원(李時遠, 1678년 ~ 1761년) : 자(字)는 이성(而聖), 호는 백원당(百源堂). 효행(孝行)이 뛰어나 부상(父喪)을 당하자 시묘(侍墓)에 정성을 다하여 영남에 선행을 수문차(搜問次) 내려온 어사 박문수(朴文秀)에게 알려지고 조정(朝廷)에 수계(首啓)하니 백원당(百源堂) 이란 호(號)를 하사받았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되었다.
이지완(李志完, 1668년 ~ 1755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중전(仲全), 호는 청간당(聽澗堂),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채(埰)의 아들. 학업에 힘써 경사(經史)를 연구하였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77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목호룡(睦虎龍)의 대옥으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이 화를 입어 성천(성천)에서 사사(사사)되자, 달려가 시체를 거두었다가 이로 인해 유적(儒籍)에서 삭제되었다. 1725년(영조 1) 민진원(閔鎭遠)으 추천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이 되고, 이어 의금부 도사.감찰(監察)을 역임,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화순현감(和順縣監)으로 수령이 도망간 영.호남(嶺湖南) 지방의 4읍을 관장하여 독전을 했고, 난이 평정되자 사임하고 유학(儒學)의 진흥에 힘썼으며 수승(壽陞)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이우면(李愚冕, 1850년 ~ 1937년) : 조선의 문신. 자(字)는 성원(聖源). 호는 유석(維石). 참판 용지(龍知)의 아들. 1881년(고종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호조.병조.예조의 참판(參判) .한성좌우윤(漢城左右尹)을 역임. 1869년(건양 1)에 특진관(特進官).비서원승(秘書院承)을 지내고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오적신(五賊臣)으 처형을 상소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후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를 거쳐 회계원경(會計院卿).홍릉제조(洪陵提調)를 지내고 1902년(광무 6)에 장례원경(掌令院卿) 및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역임하였다.
이학로(李學魯, 1867년 ~ 1933년) : 한말의 의병장. 자는 성숙(性叔), 호는 후은(後隱). 경상북도 영천출신. 정봉(禎鳳)의 아들이다. 1907년 한국군 강제해산 이후 의병봉기가 확대되어갈 때 경상남도 산청에서 의병을 일으켜 박동의(朴東儀)를 의병장으로 하고, 부장(副將)이 되었다. 1908년 8월 독립하여 의병대장이 되어 의병장 허위(許蔿)의 명령을 받고 서울에서 온 서병희(徐炳熙)와 의병 18명을 거느리고 산청군 두량골〔斗量谷〕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그뒤 곳곳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으며, 1909년 1월에는 산청군 덕산에서 서병희와 부하 11명을 거느리고 함안군 산외면 방목동에 있는 일본인 집을 습격하여 이를 소각하였다. 함안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고, 6월에는 30여명을 이끌고 칠원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고, 또 창원·의령·고성·진주 등지에서 일본인 상점을 습격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함안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으나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이인기(李寅基, 1907년 ~ 1987년) : 호는 碧溪이다, 堅幹의 후손이고 성주군 초전면 월곡리 홈실 출생이다. 일찍이 조부 勉卨 德厚에게 한학을 배우고 대구고보를 거처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제국대학교 교육과를 졸업하였다. 55년간 교육계에 헌신하였고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초대학장, 연세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 대학원장 등을 거쳐 숙명여자대학 총장과 영남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72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였다.
이광기(33대손) : 배우.- 이지용: 주식회사 서치스의 이사 및 공동창업자 (전 삼성SDS 근무)
- 이정현 (1973~) : 1973년 9월 15일 경상북도 경산군 고산읍 출신이다. 건국대학교 환경공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KOTITI시험연구원 본부장으로 재직중.
집성촌
- 경북 성주 홈실(椧谷: 명곡)
- 전북 남원군 덕과면 사율리
- 경남 창녕군 일원
- 경북 구미시 일원
- 경북 칠곡군 일원
- 강원도 화천군 하남면 삼화리
- 영천시 임고면 효리
- 경남 밀양시 일원(여은공파 동암공)
- 경북 청송군 일원
- 경남 거창일원
- 충북 음성 맹동면 쌍정리(충강공파)
- 경주시 건천읍 송선1리(선동)-판서공계_판관공파
- 경북 영천시 임고면 효리 50여호의 일족이 살고 있으며(정헌공계-주부공파)
- 경북 의성군 가음면 (문정공파 화수헌공)
- 경북 성주군 어산리 (문정공파 송암공)
- 경북 고령군 소재 (문정공파 양촌공)
- 경북 김천시 일원
- 경북 영천시 자양면 용산동(원각)
조선왕실과의 인척 관계
조선 정조의 간택후궁 경수궁 화빈 윤씨의 어머니 벽진 이씨(윤창윤의 처)
항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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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이씨
- 경상북도 소재 성씨
- 벽진 이씨
- 성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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